[원종섭 세계 현대 詩 칼럼]16. 나무들 - 필립 라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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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섭 세계 현대 詩 칼럼]16. 나무들 - 필립 라킨
  • wannabe
  • 승인 2022.08.2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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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원종섭 박사 세계현대시 감상과 이해 열린강좌 장면 탐라문학회
칼럼니스트 원종섭 박사 세계현대시 감상과 이해 열린강좌 장면 탐라문학회 

 

나무들

 


나무들이 잎을 꺼내고 있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새로 난 싹들이 긴장을 풀고 퍼져 나간다
그 푸르름에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있다

나무들은 다시 태어나는데
우리는 늙기 때문일까? 아니다, 나무들도 죽는다
해마다 새로워 보이는 비결은
나무의 나이테에 적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매년 오월이면
있는 힘껏 무성해진 숲은 끊임없이 살랑거린다
작년은 죽었다고 나무들은 말하는 듯하다
새롭게 시작하라고, 새롭게, 새롭게


 

The Trees

 

 

The trees are coming into leaf

Like something almost being said;

The recent buds relax and spread,

Their greenness is a kind of grief.

 

Is it that they are born again

And we grow old? No, they die too,

Their yearly trick of looking new

Is written down in rings of grain.

 

Yet still the unresting castles thresh

In fullgrown thickness every May.

Last year is dead, they seem to say,

Begin afresh, afresh, afresh.

 

 

“ 소리내어 읽을 때 좋은 시가 있습니다. ”

“ 내게는 이 시가 그렇습니다. ”

 

“ 잎의 은유로 인생의 순환을 노래한 명시입니다. 

시인은 이것을 산문으로 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숨결은 시만이 전할 수 있습니다. 

나무들이 잎의 혀로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모든 것은 죽는다고. 모든 어제는 가고 없다고.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하라고 합니다.  언제나 새롭게. ”

 

 

필립 라킨 Philip Larkin

1922~1985.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시단이 낳은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삶의 실체를 추구하는 시들을 썼습니다. 타임스 지가 ‘20세기 후반 영국의 가장 뛰어난 시인’ 1위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옥스퍼드대학 영문과 수석 졸업 후 평생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시를 썼습니다. 수줍음 많은 시골 출신으로 대중 앞 에 드러나는 것을 주저해 영국 계관시인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습니다. 단 네 권의 시집을 통해 죽음과 무, 허상과 실상, 생성과 소멸에 관해 썼습니다. 'The Trees' © Philip Larkin. From “High Windows". London, Faber& Faber. from The Collected Poems (Faber, 1993),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Faber & Faber Ltd. Recording used by permission of Mr. John Weeks.

4권의 얇은 시집에 100여 편의 시를 쓴 것이 전부이나 ‘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의 시집을 갖고 있을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주로 삶과 죽음, 변화를 노래한 그의 시들 중에서도 <나무들>은 가장 널리 애송되는 시 입니다.

자유롭게 잎사귀를 펼치는 봄의 나무들을 묘사하지만 ABBA의 엄격한 각운과 정형의 틀 (leaf/grief, said/spread, again/grain, May/say, thresh/afresh)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연의 질서는 어긋남이 없고, 계절의 순환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들의 초록은 어떤 의미에서 슬픔입니다. 해마다 새 잎을 꺼내는 기술을 지녔지만 나이테에는 숱한 상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니, 나무는 상실을 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잃음과 버림은 이 여행에서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나는 이 시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친구에게 주고 싶습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어린 시절 마당에 서 있던 나무, 그 이후 인생의 여정에서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던 모든 나무들이 일제히 잎을 꺼내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 생명의 잎들이 살랑거리며 속속들이 마음을 채웁니다. 시의 언어는 얼마나 대단한가. 어쨌든 우리는 겨울을 살아낸 것입니다.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닌데도 이 시가 ‘봄에 대한 뛰어난 시 중 하나’로 읽히는 이유는 한탄에 머물지 않은 데 있습니다. 소멸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봄마다 나무는 힘껏 무성해지며 우리에게 재생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늘, 어제와 작별하면서 성장합니다. 푸른 나무들과 함께 성장합시다.

 

원종섭 Won, Jong Sup

시인, 길위의 인문학자, 영미시전공 교육학 박사, 한국문화예술 비평가, NAPT 미국시치료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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