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주년 3·1절」 의병장 김학홍 선생 등 104명,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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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주년 3·1절」 의병장 김학홍 선생 등 104명,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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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2.2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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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홍 선생, 안응섭 선생 등 104명 독립유공자 포상... 건국훈장 애족장 15명, 건국포장 4명, 대통령표창 85명

    * 1949년 최초 포상 후 총 1만 7,748명(여성 640명) 포상

    건국훈장 1만 1,680명, 건국포장 1,511명, 대통령표창 4,557명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신을 바치셨던 선열들의 고귀한 생애와 정신 계승·선양은 물론, 독립유공자 포상 확대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제104주년 3‧1절을 맞이하여 이북 3도를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한 의병장 김학홍 선생(건국훈장 애국장)과 민족대표 33인을 본떠 비밀결사 단체인 위친계를 결성한 안응섭 선생(건국훈장 애족장) 등 104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김학홍 선생은 1907년~1913년 평남․함남․황해도 등 이북 3도에서 김관수 의진 부장 및 의병장으로 일본군과 일진회원을 공격하였다가 체포되었고, 안응섭 선생은 1919년 4월 전남 순천에서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을 본떠 비밀결사 위친계를 결성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이와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대한신민단 의연대원으로 단원 및 군자금을 모집한 김언배 선생(건국훈장 애국장), 미국 하와이에서 대한부인구제회 부회장으로 활동한 승정한 선생(대통령표창), 전주사범학교 재학 중 비밀결사 우리회를 결성한 김학길 선생(대통령표창) 등도 독립유공자 포상이 전수된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5명(애국장 6, 애족장 9), 건국포장 4명, 대통령표창 85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고, 여성은 33명이다.

건국훈장․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104주년 3‧1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후손에게 수여된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포상된 1949년부터 이번 3·1절까지 1만 7,748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으며, 이 중 건국훈장 1만 1,680명, 건국포장 1,511명, 대통령표창 4,557명이며, 여성은 640명에 이른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헌신한 분들께 독립유공자 포상을 할 수 있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일제강점이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신을 바치셨던 선열들의 고귀한 생애와 정신이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온전히 계승될 수 있도록 선양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도 독립유공자 포상 확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독립기념관 및 지방자치단체, 지방 문화원 등 유관기관과 독립운동 사료수집 협업 체계를 공고히 하고, 국내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하여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등 보다 다양한 유형의 독립운동 사례를 발굴해 나갈 계획이다.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포상될 주요 인물의 독립운동 공적은 다음과 같다.

❖ 이북 3도를 종횡무진하며 일본 경찰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병장 김학홍 선생(애국장)

평남, 함남, 황해도 등 이북 3도에서 의병장으로 신출귀몰하며 일본군과 일진회원을 공격하고,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유유히 따돌린 채 오히려 치명타를 입힘으로써 일본 군경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김학홍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07년 평남 맹산군에서 김관수 의진의 부장으로 활동하고, 1908년 이후 독자적으로 의진을 결성해 평남 양덕군, 함남 영흥군, 황해도 곡산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일진회원을 공격했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3년에도 평남 영흥군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선생은 이북 3도의 광활한 무대를 배경으로 종횡무진하며 일본군과 일진회원을 공격하고, 병합 이후 일본군의 3~4년간 이어진 집요한 추격을 뿌리친 채 오히려 치명타를 입힐 정도로 뛰어난 전술 역량을 발휘한 의병장이었다. 다만 의병운동 6년 만인 1913년 일본군의 정탐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혹독한 악형으로 고초를 겪은 소식이 당시 연해주 한인 동포 신문인 『권업신문』에 실려 안타까움을 준다.

❖ 민족대표 33인을 본떠 비밀결사 ‘위친계’를 결성한 안응섭 선생(애족장)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을 본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위친계(爲親契)를 결성하고 장날 군중이 많이 모인다는 점에 착안해 장터 만세 시위를 계획한 안응섭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4월 3일 전남 순천군에서 독립운동 목적의 비밀결사 위친계를 결성하고, 4월 8일과 4월 14일 두 차례에 걸쳐 계원(契員)을 비롯한 마을 주민에게 보성군 벌교시장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권유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았다.

위친계는 ‘부모를 위해 만든 계’라는 의미로, 일본 경찰의 감시와 체포를 피하고자 일상적인 친목계임을 표방해 만든 이름이다. 반면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을 모방하여 계원을 33인으로 구성하고, 장터 시위를 고무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분담한 데에서 보이듯 매우 계획적이고도 조직적인 독립운동 비밀결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 청산리전투 승리의 동력을 마련한 독립군 대원 김언배 선생(애국장)

1920년 8월 만주 독립군 부대인 대한신민단의 의연대원으로 국내에서 지단(支團)을 설치하고 단원을 모집하는 일을 주도함으로써 2개월 후 발생한 청산리전투 승리에 동력을 제공한 김언배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0년 8월 이후 함경도 일대에서 대한신민단 의연대원으로 지단 설치, 단원 및 군자금 모집 등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징역 6년을 받고 장기간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이후 중국 만주에서는 한층 증강된 무력을 보유한 독립군 부대가 끊임없이 국내진공작전을 통해 일본 관헌을 괴롭혔다. 특히 대한신민단은 중국 만주는 물론 함경도 일대에 지단을 설치해 전력을 증강해 갔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승리에서 일익을 맡은 바 있는 대한신민단은, 청산리 전투를 2개월 앞둔 8월 압록강에 인접한 함경도 일대에서 지단 설치와 대원 모집을 진행했다. 이는 청산리 전투의 대승이 대한신민단 등 연합부대의 체계적인 사전 준비 속에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 하와이에서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성 지도자 승정한 선생(여)(대통령표창)

미국 하와이의 대표적인 한인 여성 단체인 대한부인구제회의 고위 간부로 활동하면서 남편 승용환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한 승정한 선생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1937년 미국 하와이에서 대한부인구제회 호놀룰루 지방회 대표원, 1944년 라나이지방회 대표원, 호놀룰루지방회 총무 및 서기로 활동하는 한편 1937~1938년과 1944~1945년 본부 서기․재무․부회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1943~1945년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선생은 국외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인 하와이에서 대한부인구제회의 지방회 간부를 거쳐 본부 부회장까지 역임한 대표적 여성 지도자이다. 더욱이 뜻깊은 것은, 『국민보』 주필, 재미한족연합회 군사부 위원 등의 공적으로 2016년 애족장에 추서된 승용환 선생(1882-1960)의 부인으로 알려져 ‘부부 독립유공자’로서 가치를 더하게 되었다.

❖ 교사로서 안정된 미래보다 조국 독립을 먼저 생각한 김학길 선생(대통령표창)

일본의 전쟁 광기가 동아시아를 넘어 태평양으로 치닫고 있던 무렵, 교사로서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 사범학교 학생 신분이었음에도, 조국 독립에 매진하고자 비밀결사 ‘우리회’를 결성한 김학길 선생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1942년 6월 전주사범학교 재학 중 ‘우리의 얼로 우리가 나라를 세우자’는 취지로 교내에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우리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또한 석방 이후에도 국외 독립운동가들과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중국 만주로 건너가는 등 적극적인 투쟁의지를 보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졸업과 동시에 교사 임용이라는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음에도, 개인의 안락한 삶보다 조국의 독립을 중시했다는 점은, 독립운동의 가치가 퇴색되고 있는 요즘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우리회’의 강령 중에는 ‘우리는 어머니를 잊자’ ’우리는 하나의 무명용사가 되자‘는 등의 의미심장한 문구가 포함되어 있어 당시 학생들의 비장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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