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 읽는 오늘] 고길선의 시, '겨울 애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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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읽는 오늘] 고길선의 시, '겨울 애愛'
  • 유태복 기자
  • 승인 2024.03.23 1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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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애愛'

 

십이월 산빛이|
머 흐려지는 그림자의 그늘을 벗으며
한 겹 하이얀 그리움을
내려놓는다

길 따라 오가며 스며든 짙은
고독의 잔향이 걸음마다 나풀대며
알싸하게 코끝을 맴돌다
나리는 풋눈을 감싸 안고
사풋이 날아오른다.

습설 두른 빈 가지마다 꾹꾹 참다
흘러내린 눈물
어찌 된 것이 내 눈으로 슬며시
옮겨와 무심하게 떨어지고
여린 가지 묵직함에
겹으로 활시위 당기듯 앞으로 휘더니
신호 받듯 놀란 작은 새 한 마리
포로롱 숲을 안고 날은다.

매듭달 풀어 빈 가지에 걸어두면
때마침 지나가던 아스스한 풋눈은
나의 간절함 눈치채고 어느새 저만치 돌아 나간다.

날빛 가득한 따스한 겨울만이 남아있다.

고길선 시인의 시 ‘겨울 애愛’전문 (『월간 문예사조』 2024. 3월호)

 

고길선 시인
고길선 시인

시작(詩作)노트 : 습설은 제주의 날씨에 맞는 영하 1~3도 정도로 따뜻하고 습도가 90%이어야만 내리는 눈이다.

수분을 함유하고 있어 묵직하게 내리고 응집력도 강하며 게다가 무거워 잘 뭉쳐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눈이 쌓인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굳게 다져져 걷기가 편하다는 이점이 있다.

12월이 오면 온 산빛이 흐리다. 초겨울부터 눈이 올 거라는 기대감에 매번 길을 나서고, 그 길을 걷는 동안 초겨울의 몸짓으로 살짝 나붓대며 날리는 풋눈이라도 내릴라치면 어찌할지 모르는 내 겨울의 잔상이 있다.

그리하면 겨울은 이렇게 온 하늘 그리움으로 서럽게 몸서리친다.

그렇게 나리던 눈이 산 그림자까지 새를 따라 떠나고 나면 하이얀 그리움조차도 내려놓을 수 없는 질곡마다 습설이 쌓이고 또 쌓인다.

놀란 작은 박새 한 마리 숲을 안고 날아가는 작은 오후, 날빛 가득한 따스함도 이 겨울에 남겨진 기억이려니, 누구였을까. 숲의 고요를 열며 다가서는 그림자의 그늘들, 나는 다시 숲으로 돌아가 12월의 산빛을 기억해 내는 풋눈으로나 쌓여 기다리다 보면 문득 다가오실까.

고길선 시인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출생, 동아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고미술사 전공) 2007.~2013. 2023년 졸업. 《월간 문예사조》 12월호에서 신인작품상 시(경계선 외 2편) 당선으로 등단했다.

고길선 시인은 박물관 정학예사, 제주화석박물관 학예실장 2013. ~ 2020. 제주한울랜드 뮤지엄 학예실장, 2015년도 숨비소리시낭송회 회원 및 2023년도 회장, 2024. 1. 20. 사)한국문인협회 서귀포지부(시분과) 회원, 2024. 03. 월간<문예사조>3월호, 이달의 시인 선정, 2023년 12월 22일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문학관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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