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기행 12코스: 무릉 외갓집에서 용수 포구까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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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기행 12코스: 무릉 외갓집에서 용수 포구까지(4)
  • 김영희
  • 승인 2021.05.09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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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
태풍의 길목 고산 기상대
화산학의 교과서 '엉알'
수월과 녹고 남매의 전설
거북이 대가리같은 수월봉
다시 걷고 싶은 생이기정 바당길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배가 어우러진 차귀도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배가 어우러진 차귀도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수월봉(표고 78m)을 향하여 오른다. 정상에는 고산 기상대가 있다. 기상대 건물에 쓴 글이 무척 인상적이다.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 마음에 쏙 들어온다. 제주 지방 기상청의 마음가짐이라고 한다. ‘국민을 하늘처럼’이라는 글은 정부 종합 청사에도 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남서해안 최서단에 있는 기상대로 우리나라 기상 재해의 길목에 있다.

제주에서도 가장 센 바람이 부는 곳이다. 평균 풍속이 초속 7m에 달한다. 제주, 서귀포, 성산포의 두 배나 된다. 우리나라에 여러 재해를 일으키는 남서풍이 지나가는 자리다. 거의 모든 태풍이 고산 기상대를 지난다.

태풍 경로가 남해가 될지 서해가 될지 80~90% 이상 정확히 예측한다. 연간 평균 폭풍 일수가 90~100일로 직원들이 1년 중 3분의 1가량을 태풍의 영향력 아래서 생활하고 있다. 바람이 많다는 제주에서도 가장 센 바람이 가장 많은 날 부는 곳에서 지내는 그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수월봉 정자에서 바라본 한라산과 서부 오름 군락들.
수월봉 정자에서 바라본 한라산과 서부 오름 군락들.

오늘도 아니나 다를까 수월봉 위로 부는 바람은 세차다. 탁 트인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차귀도와 누운 섬(와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배들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엉알길과 그 너머 당산봉, 광활하게 펼쳐진 고산 평야, 저 멀리 실루엣 같은 한라산과 서부 오름 군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3코스의 종점인 저지오름과 그 너머 풍력 발전기 옆 병악오름도 보인다. 다만 전봇대 전선 줄이 경관을 보는데 성가시게 할 뿐이다.

수월봉 해안 절벽은 동쪽으로 약 2km까지 이어진다. 이 절벽을 엉알(엉은 절벽, 알은 아래를 뜻하는 제주어)이라 부른다. 엉알을 따라 시멘트로 잘 포장된 절벽 아래 길, 엉알길이 있다. 절벽 곳곳에는 맑은 샘물이 솟는다. 녹고물이다.

옛날 수월이와 녹고라는 남매가 몹쓸 병에 걸린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 지나가던 스님이 이를 딱하게 여겨 백 가지 약초를 먹이면 낫는다고 한다. 하나 남은 마지막 약초, 오가피가 수월봉 절벽에 있었다. 누나가 캐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다. 동생 녹고가 누나를 잃은 죄책감과 좌절감에 17일 동안 슬피 울었다. 녹고의 눈물이 녹고물이 되었다. 누나 수월이 이름에서 수월봉, 동생 녹고의 눈물에서 녹고물오름이라도 한다.

화산재 지층의 줄무늬가 기묘하다 못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세계 지질학자들이 화산학 교과서라는 평가가 실감이 난다.
화산재 지층의 줄무늬가 기묘하다 못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세계 지질학자들이 화산학 교과서라는 평가가 실감이 난다.

바람의 언덕 수월봉에서 내려오다 보면 정자가 하나 있다. 녹고대다. 작년에는 없었는데 새로 지었나 보다. 수월봉 아래 겹겹이 쌓인 화산재 지층은 나이테 같다. 화산탄들이 박히면서 지층이 휘어져 있다. 화산 폭발이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모양이 기묘하면서도 신비스럽기까지 해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림으로도 패션으로도 이러한 줄무늬는 만들지 못하리라. 세계 지질학자들에게 화산학 교과서로 불린다.

엉알길 절벽엔 드문드문 해국이 피어 있었다. 올레 6코스에 있는 해국의 자생지 게우지코지 떠올라 기뻤다. 엉알길이 끝날 즈음 자구내 포구가 나온다. 서귀포의 자구리 해안과 이름이 비슷하다. 차귀도 가는 배가 뜨고 한치로 유명한 포구다. 올레 1코스 시흥리 종달리 해안도로에서처럼 한치 말리는 풍경이 이채롭다. 자구내 포구를 뒤로 하고 당산봉으로 향한다.

당산봉에서 바라본 수월봉의 모습. 거북이 대가리처럼 앞으로 삐쭉 튀어나와 있다.
당산봉에서 바라본 수월봉의 모습. 거북이 대가리처럼 앞으로 삐쭉 튀어나와 있다.

당산봉(포고 148m)에 오르면 차귀도가 바로 코 앞이고 수월봉은 과연 거북이 대가리같다. 옛날 제주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을 두려워하여 산방산 앞 용머리 해안의 지맥을 끊고 가던 중국의 호종단이 탄 배를 한라산 수호신이 매로 변하여 폭풍을 일으켜 침몰시켰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펼치는 통쾌한 복수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호종단의 배가 돌아가는(歸) 것을 차단(遮)했다고 하여 차귀도(遮歸島)다.

고산리에서는 수월봉 자리를 거북이 대가리라고 한다. 제주도 전체를 거북이 같다는 발상이 설문대 할망 설화만큼이나 입을 딱 벌어지게 한다. 한라산은 거북이의 등이 되는 셈이다. 실제 한경면에는 제주의 머리를 뜻하는 두모리(頭毛里)가 있고 구좌읍 종달리에는 제주의 꼬리를 의미하는 지미봉(地尾峰)이 있다. 근거 있는 상상력이다.

생이기정 바당길을 내려 오면서 바라본 누운 섬과 그 너머 차귀도의 모습. 다시 한번 더 와서 이 길을 거닐고 싶다.
생이기정 바당길을 내려 오면서 바라본 누운 섬과 그 너머 차귀도의 모습. 다시 한번 더 와서 이 길을 거닐고 싶다.

당산봉 정상에서 시작하는 1.6km 구간의 생이기정 바당길은 이름도 예쁘지만 무척 매력있는 길이다. 제주어로 생은 새, 기정은 절벽, 바당은 바다를 뜻한다. 새가 사는 절벽의 바닷길! 길도 경사가 완만하여 걷기에 부담이 없다. 무엇보다 차귀도와 바다를 바라보면서 거닐 수 있어 좋다. 이 길만을 걷기 위해 다시 오고 싶다. 그 유명한 차귀도의 일몰도 보고 싶다.

생이기정 바당길을 내려와 조금 더 걸어가면 한국 최초로 중국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하던 김대건 신부가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용수 포구가 나온다. 올레 12코스의 종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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