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산책: 힌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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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산책: 힌두교
  • 김영희
  • 승인 2024.03.1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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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가 풀이한 바가바드기타(M.K.Gandhi interprets the Bhagvadgita)를 중심으로(141)

-모든 행동은 구나(guna)에 의해 행해진다
-행동의 목격자로서 행위하는 사람은 자아(에고)에 대한 애착이 없다
-깨달은 사람은 구나(사트바, 라자스, 타마스)를 초월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찬탄하면서 바라볼 뿐이다
-힌두교의 '아트만(atman)', 불교의 '참나(불성)', 그리스도교의 '영혼'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십구년 일자부설'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부처'가 되는 길과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번역'이 '반역'이 될 수도 있는 번역의 어려움
-번역은 '제2의 창작', 우리나라에 번역에 관련된 학과의 신설 필요성

쉬리 크리슈나(Shri Krishna)는 조금 전에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사회에 바르나스<varnas: 질서>의 혼란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구절에서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말하고 있다. 만약 아르주나(Arjuna)가 어떤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취했더라면 사람들은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들은 그가 전혀 바라지 않았던 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전쟁을 위해 그곳에 모이도록 요청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그들의 마음에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요가의 정신 속에서 일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 그의 의무를 해야 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고무시켰다.

 

     모든 행동은 프라크리티(prakriti)의 구나(guna)에 의해 전적으로 행해 진다.

     ‘나’라는 감각에 현혹된 인간은 ‘내가 그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제3장 27절)

 

무지 속에 잠긴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의 본성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에 의하여 촉발된 것이다. (<평상시 눈꺼풀이 자연스럽게 깜빡이는 것을 두고> 눈꺼풀이 깜빡거린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바보이거나 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눈이 깜빡거리는 것이 아니라 눈이 고통을 받아 그런 것이다.)

단지 그가 한 행동의 목격자로서 행위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하여 감탄하며 바라볼 것이다. 자신의 능력은 별로 없지만, 자아에 대한 애착이 없이 일하는 사람은 자아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일하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맺을 것이다.

 

 

<해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눈꺼풀을 깜빡거리면서 생활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눈이 아프거나 하면 불편할 때 비로소 눈꺼풀이 깜빡거리는 것을 새삼 느낀다. 모든 행위도 눈꺼풀이 깜빡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본성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그런 모습에 개입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며 관조한다. 그런 자기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것이다고 애착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본성이 움직이는 모습을 감탄하면서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관조하고 있는 것이 아트만(atman)이다.

< >속의 글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필자가 써 넣었다. 모든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구나<guna:힘, 성질>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이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이며 이 세 가지 힘(성질)에 의해 우리 본성이 움직인다는 것이 힌두교의 입장이다.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업(業)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트만(atman)’-불교적으로는 ‘참나(佛性)’,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영혼’-은 그것들을 초월해 있고 그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트만(atman)은 구나(guna)들로 이루어진 행동을 다만 말없이 관조할 뿐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49년 동안 진리를 설하고도 한 말씀도 안 했다고 얘기하는 것일까. 아트만(불성)의 자리에서 아트만(불성)이 한 말이지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몸은 그 도구일 뿐. 부처님의 아트만(불성)이 말하고 우리의 아트만(불성)이 들었을 뿐이다. 참된 실체의 입장에서는 말한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다.

금강경의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에는 ‘범소유상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말이 있다. ‘모든 상(相)이 있는 것은 허망한 것이니 상(相)을 상(相)으로 보지 않는다면 여래(如來)를 볼 것이다’라는 뜻이다.

 

나라는 아상(我相), 남이라는 인상(人相), 내가 중생이라는 중생상(衆生相), 목숨이 한정되어 있다는 수자상(壽者相), 이 네 가지의 사상(四相)이 본래 허망하다는 것이다. 본래 나와 너가 없다.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나와 너가 하나일 때 불도를 이룬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과 같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와 너가 사라진다. 유마경(維摩經)의 유명한 구절인 ‘중생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 된다.

‘나’는 본래 중생이 아니고 '부처'다. 항상 미망(Maya, 無明)속에서 중생이라고 생각하며 살 따름이다. 그래서 중생처럼 생각하고, 중생처럼 말하고, 중생처럼 행동할 뿐이다. 본바탕이 부처임을 까마득히 잊고서.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하느님)을 알고 믿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한다. 진실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아버지(하느님)의 것은 그대로 자녀의 것이 된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가지고는 있지만, ‘인간의 수준’에서 ‘신(神)의 수준’으로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 있다. 목숨이 한량없는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아미타불을 지칭하는 말이다. 본래 우리의 진면목인 참된 실체가 그렇다. 아트만, 불성(참나),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다. 허망한 사상(四相)에 끄달리지 않고 참된 실체을 바라보게 될 때 여래<如來: 자신의 참 모습인 참나, 하느님, 영혼, 불성, 아트만>를 보게 된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번역을 하면서 자주 느낀다. 도 닦는 마음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간디가 풀이한 것이 아니었다면 포기했을 것임을. 번역의 어려움 또한 실감한다. ‘번역’이 ‘반역’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에 번역에 관련된 학과가 대학에 있어야 함도 절실히 느낀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집단 지성이 번역에 이바지해야 힘을 발휘한다. 일본을 통하여 번역되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가 우리 말로 번역해야 문화가 종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우리의 사고체계 속에 자리 잡고 우리의 값진 정신세계를 형성할 것이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다.

 

*구나(guna)의 세 가지 힘(성질)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에 대한 내용은 '종교 산책: 힌두교, 간디가 풀이한 바가바드기타(M.K.Gandhi intreprets the Bhagvadgita) (7)' 기사(2021.5.15)를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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