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기행 19코스: 조천 만세동산에서 김녕 서포구까지(5)

가슴을 저미는 너븐숭이 4.3기념관 영상물 첫 자막 글 제주 4.3사건에 대한 잘 정의된 게시물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과 북촌리의 제노사이드 유익하고 친절한 문화해설사의 설명 소설 '순이 삼촌'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구절들

2022-12-31     김영희

     

음력 섣달 열여드레 날,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400여 명의 제사를 지낸다. 그 곳이 북촌리다.

 

                                 북촌리엔 바람이 살고 있다.

                          아직 이생을 떠나지 못한 애기 울음이

                               밤마다 너븐숭이를 헤매고 있다.

 

                               북촌리엔 구름이 살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의 핏빛 눈물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북촌포구에 정박해 있다.

 

                               북촌리엔 그림자가 살고 있다.

                               200년이 넘은 팽나무 아래

                            젖먹이 어린 애기와 순이 삼촌이

                               서로 끌어안은 채 누워있다.

 

                                북촌리는 60여 년 전,

                              그날을 아직도 살고 있다.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본 4.3관련 영상물 맨 처음 자막에 나오는 글이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감동적이다. 기념관 전시물을 다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더 가슴에 다가온다.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그림이 전시관 입구에 있다. 젖먹이 아이가 쓰러진 어미의 피젖을 빨며 우는 모습은 그 당시 현장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도 정의 내리고 있다. 4.3사건 진상 보고서를 인용하여.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그 당시 북촌 초등학교의 모습. 그 날 400여 채의 가옥이 하루아침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1천 여명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제주 4.3사건에 대하여 이만큼 잘 정의된 것을 게시물로 본 적이 없다. 서청(西靑)은 폭행, 강도, 살인, 고문, 영아 살인, 거주민 학살 등 백색테러를 무수히 자행하던 민간단체였던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을 줄인 말이다. 다만 토벌대를 ‘군경’ 토벌대로 썼더라면 더 의미가 뚜렷하였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제주 4.3 사건은 1950년 한국 전쟁의 전초전이었던 셈이다.

어린 학생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 내라고 군인들이 들볶고 마을의 보초를 잘 못 섰다고 19명의 민보단원들을 맨 처음 학살했다. 두 번째 학살이후 세 번째부터 무작위로 한꺼번에 수십명씩 끌려갔는데 그 때부터 제일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고 마을 주민이 증언하고 있다.

젊은 시절 제주에 여행 왔던 외국인들을 만났을 때 제주 4.3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부끄러워한 적이 있다. 잘 몰랐기 때문이다. 외국에 이처럼 잘 알려진 것은 국제법상 전쟁 중일지라고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학살)의 대표적 사례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주민 대학살은 한국 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미군에 의한 학살을 다룬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을 연상시킨다. 1951년 피카소가 그렸던 그림은 반공법에 묶여 있다가 70년 만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너븐숭이 4.3기념관을 나서면 길 건너 편에 애기 무덤이 있다.

문화 해설사가 말하는 마을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 400여 명이 아니라 족히 600여 명을 될 것이라고 한다. 가족이 몰살당해 증언해 줄 사람도 없어 촛불이 켜져 있는 전시관 사망자 명단 사이에는 이름을 몰라 ‘◯ ◯ ◯ 자 또는 처’로 표시된 경우도 있다. 북촌리는 무남촌(無男村)이 되었고 꿩약 싸이나를 먹고 죽은 순이 삼촌의 옴팡(움푹 들어간 모양을 나타내는제주어)밭에는 마치 무 쌓은 것처럼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함덕리와 동복리가 평지라면 북촌리는 무장대가 숨기 좋은 약간의 구릉지대였다. 무장대에 가담은 안 했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은 아마도 죽어서 빨갱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나무 계단을 내려가면 옴팡밭에는 순이 삼촌 문학비가 있다.

소설 '순이 삼촌'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구절들이 가슴을 저민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 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삼십 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삼십 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너븐숭이 기념관을 나오면 길 건너편에 애기 무덤이 있고 나무 계단으로 내려간 옴팡밭에는 순이 삼촌 문학비가 있다. 비석들은 쓰러져간 사람들처럼 누워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