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는 집에 어려 가지 물건을 보관하는 건축물이며 등기부에 등기한 건축이 많지만 미등기한 건축물도 많았다. 화북동 창고는 마을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건축물대장에 등재된 그것으로 볼 수 있다.
창고 외형을 보면 제주 석으로 허튼 층 쌓은 후 시멘트로 마감을 했고 정면에 출입문이 있으며 양쪽에는 창문이 있다. 창문은 햇빛을 들어오게 하는 기능과 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주는 기능으로 만든다.
지붕은 슬레이트이며 슬레이트 지붕은 새마을 운동이 한창 진행될 무렵이다. 1961년 박 정권이 들어서면 전국에 지붕개량을 실시하는데 당시 제주에도 대다수 집이 개량되었다. 함석(도당. 양철)지붕이었고 함석으로 했더니 비가 오면 소리가 요란하여 1970년 초부터 슬레이트로 교체하였다.
슬레이트 지붕이 바람물질이 나온다는 것은 1990년 중반 들어서야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급히 조차한 것이 지원금 줄 테니 슬레이트 지붕을 철거하라는 것이다. 그 조례는 지금도 유효하다.
창고 높이는 일반 주택보다 높게 짓는다. 당시 가장 창고에 많이 쌓아놓는 물건은 절간고구마와 유채였다. 각 마을마다 절간고구마를 생산하여 조합에서 받아들이고 유채, 맥주보리도 마찬가지다. 유채는 기름의 재료가 되었고 절간고구마는 주정이 재료가 되었다.
지금도 읍면에 하나, 둘 정도는 감저공장 터가 남아 있기도 하다. 감저공장은 반드시 물이 좋은 해안마을에만 존재하였다. 제가 기억으로 제주시 서쪽에 도두, 하귀, 곽지, 옹포, 서림리 정도다.
1970년대 정도에 각 마을에 창고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지금도 저런 창고 건물은 시골로 들어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이후 마을에서 공동으로 짓는 마을창고보다 개인이 짓는 창고가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이는 1980년 들어서야 한다. 이는 제주도 산간지역이 밀감(온즈밀감) 밭이 유행하던 시기다.
특히 남쪽 지역에서는 남원, 표선, 중문을 중심으로 밀감 밭이 꽉꽉 들어찼다. 밀감이 돈 된다고 하니 너도, 나도 과수원에 매달리는데 산 북쪽도 한림읍이 가장 먼저 시작했고 애월, 대정 서쪽(무릉. 영락. 신도) 지역으로 확산하였다. 지금도 중산간 지역으로 올라가면 과수원에 창고는 많이 남았다.
당시 창고 건물은 돌챙이(석공)가 축담을 쌓았다. 밭담은 웬만하면 밭담 정도는 쌓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돌챙이가 필요하지 않았고 인건비 때문에 나이가 20세 넘으면 으레 돌을 만질 줄 안다.
세월이 흘러도 창고는 쉽게 헐지 않았으며 특히 마을창고는 용도가 다양하여 지금도 마을에 남아 있는 데 헐어버린 마을은 창고 자리에 마을회관을 짓는 것이다.
마을회관이 성행하게 되는 시기는 2000년 들어서야 한다. 이유는 지방자치 시대라 도의원 동원하여 마을회관 짓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우리 삶의 흔적이라 가능하다면 마을 창고는 남겨 두면 먼 미래 후세대들이 오늘 나 같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이미 60년이 넘은 이야기지만 기억이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