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기행 12코스: 무릉 외갓집에서 용수 포구까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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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기행 12코스: 무릉 외갓집에서 용수 포구까지(3)
  • 김영희
  • 승인 2021.04.30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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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리와 신도리 주민에게 드리는 사과의 말씀
모든 개혁의 기축인 언론 개혁
관광지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사학계와 하멜 표류기에 대한 고찰
문재인 정권과 세월호 참사
도구리에 얽힌 순덕과 현수가 부부가 된 사연
아직도 살아있는 시골 마을의 후한 인심
신도 바당 올레길. 길게 뻗은 해안도로가 시원스럽다.
신도 바당 올레길. 길게 뻗은 해안도로가 시원스럽다.

자만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올레길도 반은 넘었다. 한번 확인해봐야 하는데 자신있게 예단한 것이 틀려버렸다. 지난번 올레 인향동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가 무릉2리는 인향동, 좌기동, 평지동이고 무릉1리는 해안가에 있다고 들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신도1리, 2리, 3리가 해안가에 있어 무릉1리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동과 리를 구분하지 않다니...... 예측해서 계산한 것이 결단이 되면서 기쁨이 되어버린 순간 자아도취의 함정 속에 빠져버렸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것이 자만심으로 변하는 순간이 위험하다. 운전도 뭐 좀 알 때 사고가 잘 나는 것처럼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이다. 신도 1리, 2리, 3리를 무릉1리라고 마음대로 구획 정리를 해버렸으니......신도리 주민들과 무릉리 주민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근거 없는 추측은 금물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어느 누가 말했듯이 우리나라 언론도 신문에서 오보를 냈으면 그 낸 지면만큼 정정이나 사과를 했으면 좋겠다. 방송에서 했다면 잘못 보도한 시간만큼 꼭 같은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서 방송으로. 그래야 언론이 사회의 공기(公器)로서의 제 기능을 다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법 개혁, 검찰 개혁, 정치 개혁, 경제 개혁보다도 시급하고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언론 개혁이다. 모든 개혁이 성공하려면 그 기축인 언론이 먼저 개혁되어야 한다. 사실과 진실을 생명처럼 삼지 않는다면 그 언론은 이미 죽은 언론이다.

언론을 사회의 공기(公器)라고 하는 것은 ‘공동(公)의 그릇(器)’이라는 말이 아닌가. 모두가 사용하는 공동의 그릇! 공동의 그릇이 네모나면 둥근 것도 네모난 것처럼 보인다. 공동의 그릇이 둥글면 네모난 것도 둥근 것처럼 보인다. 그런 속에서 어떻게 올바른 여론이 형성될 수 있겠는가.

 

양식장이 없어서 인지 바다가 더욱 깨끗하고 푸르게 보인다.
양식장이 없어서 인지 바다가 더욱 깨끗하고 푸르게 보인다.

제주도 서쪽 끝에서 맞이하는 신도 바당(바다의 제주어)올레를 걷는다. 제주도 동쪽 끝에서 걸었던 성산포와 표선에서의 바당올레가 떠오른다. 거기서는 양식장이 많았다. 여기서는 주민들의 반대로 양식장이 없다. 그래서인지 바다가 깨끗하고 더욱 푸르다. 언론도 제주도의 서쪽 바다처럼 청결해지고 더 싱싱하게 푸르러야 할 것이다.

10여 분도 안 되어 ‘하멜일행 난파희생자위령비’가 나온다. 1653년 8월 16일 하멜 등 그 일행 64명이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을 탔다. 일본 나가사끼로 항해하던 중 큰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 신도 2리 해안에서 암초에 좌초 난파되었다. 익사자 26명 병사자 2명, 28명이 희생된 것을 위무하고자 세운 비다. 곁에는 이곳이 하멜표착지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해주는 한글과 영문으로 된 표지판이 서 있다.

표착된 지 41년 후에 제주 목사로 부임했던 이익태 목사가 쓴 <지영록>의 기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표착된 위치를 하멜 표류기의 삽화와 신도 2리 해안의 사진 비교를 통해서인지 신빙성이 더 있어 보인다. 표착지가 사계리 해안가, 고산리 환장동, 신도 2리 해안가, 하모 해수욕장 부근 등이라는 일련의 문제를 학계에서 고증을 통해 정확히 정리를 해줬으면 좋겠다. 유적지에서 논문에나 실릴 듯한 ‘하멜 표류기에 대한 고찰’을 읽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 정도가 안된다면 사학계가 면목이 없는 일이다.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지역주민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를 떠나 객관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학계의 몫이 아닌가.

진실 여부야 어떻든 관광지도 부익부 빈익빈의 시대인 것 같다. 사계리에 있는 하멜 전시관 같은 것을 이곳에 설치했다면 관광지의 균형 발전 차원에서도 얼마나 좋았을까. 좀 더 부족한 곳과 구석진 곳, 즉 사회적 약자에게 더 신경 써주고 돌봐주는 것이 정말 된 사람이 할 일이다. 참된 지도자가 할 일이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길이다.

인연의 도구리에 얽혀 부부가 된 효녀인 이순덕과 서왕모의 아들인 현수를 재현한 현수상과 순덕상도 보인다.
인연의 도구리에 얽혀 부부가 된 효녀인 이순덕과 서왕모의 아들인 현수를 재현한 현수상과 순덕상도 보인다.

세월호의 참사도 공소시효가 끝나는 7년이 다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진실이 밝혀지고 있지 않다. 민초들이 촛불 들어 탄생한 정권이 귀천을 헤매는 아이들과 통곡하며 울부짖는 부모들의 눈물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참담한 일이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낳은 사건의 진실이 지금껏 밝혀지고 있지 않다면 정권 교체가 무슨 소용이 있고 의미가 있을까. 지금 정권이 나약해서인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너무 강해서인가.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진실이 밝혀질 때 그 바탕 위에서 역사는 진보한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도 이루어진다. 상생도 가능해진다.

신도 바닷가에는 용암이 만든 크고 작은 도구리(함지박을 뜻하는 제주어)가 네 개 있다. 도구리는 나무나 돌의 속을 둥그렇게 파낸 돼지나 소의 먹이통을 말한다. 용암이 만든 자연 도구리인 셈이다. 이 도구리 속에는 밀물 때 떠밀려 왔다가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문어나 물고기 등이 산다. 그래서 전설이 생겨났나 보다.

옛날 선녀들이 하늘나라의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신도 바닷가에 내려왔다. 해산물을 넣어둘 곳을 찾던 중 도구리 네 개를 발견했다. 큰 도구리 하나에는 해산물을 넣고 작은 도구리 세 개에서는 목욕을 했다. 이 마을에는 몸이 아프신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이순덕이라는 효녀가 있었다. 가뭄과 흉년이 들어 한 끼니를 마련하기가 힘든 어느 보름날, 도구리 근처에 물질(해녀들이 하는 바다 일을 뜻하는 제주어)하러 왔다가 큰 도구리에 갇혀있는 거북이 세 마리를 보았다. 홀아버지 약으로 쓰려고 잡았다. 거북이 세 마리는 옥황상제, 여선(女仙)들을 총괄 지휘하는 서왕모(西王母), 동해 용왕의 아들이었다.

작은 도구리 세 개에 자신들을 각각 풀어주면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겠다고 했다. 보름달 뜨는 날만 도력을 발휘하여 고향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첫째 도구리 거북에게 아버지가 병이 나아 오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해안가 모래밭에서 나오는 물을 떠다 마시게 하면 낳는다고 하였다. 그게 지금의 모살물이고 첫 번째 도구리는 ‘무병장수의 도구리’가 되었다. 두 번째 도구리의 거북에게는 아버지 병이 나았으니 소원이 없다고 했다. 이에 감동한 거북은 고향에 갔다가 일 년 후 건장한 ‘현수’라는 청년으로 돌아와 같이 결혼하여 순덕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인연의 도구리’가 되었다. 세 번째 도구리의 거북에게도 더 소원이 없다고 말했다. 정 그렇다면 자기 처지와 같은 다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하면서. 그래서 ‘소원의 도구리’가 되었다. 미래의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마지막 소원을 남겨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젊은 남녀들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서왕모의 아들인 현수와 결혼한 순덕은 남편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알고 고향처럼 선도 복숭아나무를 가득 심었다. 서왕모의 아들을 만나러 왔던 신선들이 복사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고 ‘새로운(新) 무릉도원(武陵桃源)’ 같다고 명명한 것이 신도(新桃)리가 되었다.

순덕의 마음에 반한 남편은 물질하다가 힘들까 봐 쉴 수 있는 여를 두 개 만들었다. 그것이 큰 홍합여, 작은 홍합여다. 현수와 순덕이처럼 신도리 사람들은 부부 금슬이 좋을 것 같다. 세 번째 소원의 도구리처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후덕한 마음씨를 가졌을 것 같다.

수월봉을 향하여 가는 길에 만난 바람에 흩날리는 보리밭 물결이 아름답다.
수월봉을 향하여 가는 길에 만난 바람에 흩날리는 보리밭 물결이 아름답다.

신도 포구를 벗어나 수월봉 입구까지는 50여 분 걸린다. 끝없이 펼쳐진 평지 위의 농토를 보노라면 도원마을(신도리의 옛 지명)이 제주도에서 왜 두 번째로 잘사는 곳이 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밭들 사이 잘 닦여진 길을 걸어가노라면 평지라 그런지 모슬포처럼 바람이 세차다. 마늘밭에서는 마늘쫑을 뽑고 있었다. 마늘쫑은 마늘장아찌 등 건강한 먹거리로도 인기 있다. 마늘의 꽃줄기인데 제거해줘야 마늘이 잘 자란다고 한다.

수월봉 아래 고산리 한장동 마을 커다란 창고 안에서는 마을 사람 몇몇이 일하다가 마침 새참을 먹고 있었다. 마실 것과 함께 메밀떡이며 도너츠를 건넨다. 푸짐한 시골 인심이 좋다. 이 덕에 힘을 얻어 다시 잘 걸을 수 있다. 이미 지나온 냇물이 흐르는 배수로가 잘 정비된 그곳을 경계로 하여 대정읍 신도 3리와 한경면 고산리 한장동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서귀포시와 제주시의 경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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