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한 편 읽는 오늘] ‘자작나무 숲, 그 고혹의 기억 속으로’ / 권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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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한 편 읽는 오늘] ‘자작나무 숲, 그 고혹의 기억 속으로’ / 권규학
  • 유태복 기자
  • 승인 2021.04.26 0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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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도 한재 마을 ‘자작거림’ 자작나무숲 굴락지
경상북도 청도 한재 마을 ‘자작거림’ 자작나무숲 군락지

‘자작나무 숲, 그 고혹의 기억 속으로’

 

숲을 바라본다
오래도록 앉아 있거나 서성이듯 걷는다
사위(四圍)가 고요히 익어가는 시간
나무 사이를 물들이며 천천히 누린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겨울 하늘과
하얗게 드러난 자작나무의 어울림
맑은 눈을 가진
어느 소녀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나무숲을 걷는 내내 단꿈에 빠져든다
향긋하고 새하얀 꿈
잊힌 기억처럼 하얗고 찬란하다
자작나무 숲에는 순백의 신성함이 살아 숨 쉰다
그래서 치유의 숲인가 보다


하얀 숲에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잎새만 스치고 말 일이지
자작자작, 생경스런 소리를 낸다


하얀 숲에 햇볕이 스며든다
햇살이 비추면 눈을 마주하고
그저 손을 뻗을 일이지
꼿꼿이 등지고 서서
쭉 뻗은 검은 다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어느새 하얀 숲에 눈(雪)이 번진다
눈이 오면 켜켜이 쌓일 일이지
뽀얀 살결에 차가운 눈을 촉촉이 배어 안는다


하얀 숲에 어둠이 내린다
깜깜한 밤이 오면
느긋이 잠들고 말 일이지
하얀 별을 숲속 가득 드리운다


계절에 따라 바람이 바뀌고
몸짓과 색깔이 달라지는
언제나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
그곳에
어느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이 도드라진다.

 

-권규학의 시 ‘자작나무 숲, 그 고혹의 기억 속으로’ 전문-

 

권규학 시인
권규학 시인

권규학 시인은 시작 노트에서 언제였던가…, 강원도 인제 모 부대에서의 군 복무 시절, 인근의 수산리와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을 다녀온 적이 있다. 어느새 30년을 훌쩍 뛰어넘은 세월의 더께 너머 그때 본 그 숲은 그저 아름다운 숲일 뿐, 다가서는 느낌은 놀랍지도 특별하지도 않았으며, 그냥 무턱대고 즐거울 뿐이었다. 아마도 그때는 숲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어느새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길기만 했던 공직생활…, 은퇴와 동시에 숲으로 눈을 돌렸다. 숲 동무들과 함께 걷는 숲길은 그저 흥미로웠고, 활력을 주는 그런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은퇴자의 눈에 비친 숲(자연)은 정녕 신비로운 대상이었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때 그 숲에 대한 기억이 지금에 와서 이토록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서는 건 무슨 이유일까.

은퇴 후, 경상북도 청도에 둥지를 틀었다. 서울 면적의 1.2배를 자랑하는 청도 고을은 산과 물과 들이 고루 갖춰진 살기 좋은 고장으로 천년고찰 운문사를 품은 운문산 줄기에 자연휴양림과 국립 숲체원이 자리를 잡았다. 식수 전용의 맑은 물을 담수한 운문댐 하류에는 아름다운 생태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미나리로 유명한 한재 마을…, ‘자작거림’에는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이 은빛 찬란하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옮기려면 넉넉한 시간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늘 생각은 하지만 생각만으로 끝나는 생각의 무더기들…, 속삭이는 자작나무의 노래를 들으며, 발아래 풀꽃에 눈을 맞추고, 손톱보다 작은 풀벌레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 제각각 풀들의 이름을 헤아리고 그 생김새를 비교하는 것, 그 모든 게 자연과의 진실한 대화이다. 이곳 청도 한재 마을 ‘자작거림’에서 옛 기억을 더듬어 수산리⋅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을 소환한다. 자작나무 숲(자연)과 함께하는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며. 라고 밝혔다.

권규학 시인 겸 수필가는 경북 안동 출생,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육군 장교 및 공무원(38년) 정년퇴직했다. 수필 1983년 등단, 시 2004년 한맥문학 등단하여 현재 시인, 수필가로 문학 활동(늘푸른문학회 회장)과 숲해설가⋅청도일보 전무이사(기자)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시집 1집 시가 삶이 될 수 없는 이유, 2집 그대 사랑 앞에선, 3집 하늘바라기, 4집 사랑 바라기, 5집 마주나기, 6집 어긋나기, 7집 사랑이 잠시 외출을 했을 때, 8집 바람 돌이, 9집 숲길을 걸으며, 공저 시집 외 150여 권 기타 칼럼 및 시사논단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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