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기행 9코스: 대평포구에서 화순금모래해수욕장까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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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기행 9코스: 대평포구에서 화순금모래해수욕장까지(1)
  • 김영희
  • 승인 2021.01.2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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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천과 용왕 아들과 대평리
제주 여행 고수와 하수의 기준
대평리 바다 강태공들과 박수기정 오르는 말길
이제는 가보지 못하는 '이두어시'
월라봉과 일제 동굴 진지들
진모루 동산과 진드르, 정뜨르, 알뜨르
감동을 주는 이사야서의 성경구절
감산리 군마육성소에서 원나라에 헌납했던 공마들이 대평포구로 올 때 지나왔던  애환이 깃든 말길이다.
감산리 군마육성소에서 원나라에 헌납했던 공마들이 대평포구로 올 때 지나왔던 애환이 깃든 말길이다.

‘용왕의 아들이 학식이 높은 스승에게 3년간 학문을 배웠다. 떠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소원을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은 안덕계곡을 흐르는 창고천이 너무 시끄러워 공부에 방해되니 물소리를 없애달라고 하였다. 용왕은 박수기정이라는 방음벽을 치고 군산을 에워싸게 만들어서 소원을 들어주었다.’ 만화로 대평리를 소개하는 표지판이 재미있다. 제주올레 9코스 시작하는 곳에 있다. 용왕의 아들 덕분인지 창고천은 대평리로 흐르지 못하고 군산과 박수기정을 에둘러서 중간스탬프를 찍는 화순리로 흘러 바다로 나간다. 중간스탬프를 찍는 곳에 ‘개끄리민교’라는 다리가 있다. 다리 밑에 개끄리민소라는 못이 있는데 마치 바위 속으로 개를 끌고 들어가는 것 처럼 깊이 파여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운동 나온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다리 주변에서 바닷가까지를 황개창(시내를 뜻하는 제주어 ‘내창’의 줄임말)이라하고, 다리 위로 6,700m 쯤 올라가면 임금내가 있고, 그 위를 창고천이라고 말한다. 황개창에서는 장어와 참게가 많이 잡힌다고 하면서. 같은 시내라도 지역마다 위치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대평리를 다른 말로 난드르라고 한다. 용왕이 ‘나온’ 들판, 또는 바다로 뻗어 ‘나간’ 넓은 들판이라고 해서 ‘난’ 드르(들판을 뜻하는 제주어)다. 제주말로 ‘오시록(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다는 제주어)’한 곳에 있는 마을이라 그런지 제주민의 아픈 4.3의 상처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던 곳이 지금은 원주민과 이주민의 비율이 6:4 정도가 되며 제주도에서 가장 급변하는 곳이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자유로운 영혼들이 깃드는 곳, 마치 강원도 산간마을 같은 곳, 아는 사람들만 아는 곳이라고 한다. 제주 여행의 고수인지 하수인지 구분하는 기준이 대평리를 아는지 모르는지에 달려있다고. 언젠가 한 번 대평리로 걸어서 들어가고 싶어 일주서로가 지나는 안덕계곡 입구에 있는 감산리 마을에서 군산 중턱으로 나 있는 도로-오고 가는 사람들은 없고 차들만이 보이는-를 걷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제주시 아라동에서 281번 버스를 타고 서귀포 LH아파트정류장에서 내렸다. 대평리 가는 531번 버스로 갈아타서 30여 분 정도 걸린다. 박수기정이 천혜의 요새처럼 턱 버티고 있고 멀리 송학산과 가파도, 마라도도 보인다. 땅도 들판이지만, 바다도 넓게 펼쳐진 넘실대는 푸른 들판같다. 대평포구 앞에서 시작 스탬프를 찍고서 가다 보면 바다로 길게 뻗쳐나간 너른 돌들 위에서 강태공들 모습이 보인다. 왜 대평리로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낚싯대에 물고기가 물리는지 마는지는 차치하고 한 폭의 그림 같다. 지금은 올레길이 변경되어 가 볼 수 없지만, 박수기정 위에 올라 의자가 놓여 있는 전망대 같은 곳에서 바라보면 더 아름답다. 절로 감탄사만이 나온다. 박수기정의 ‘기정’은 제주어로 벼랑을 뜻한다. 벼랑 1m 암벽에서 사시사철 나는 물(水)을 박(바가지)로 떠먹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수기정에 오르는 돌길을 ᄆᆞᆯ질(말길)이라고 한다. ᄆᆞᆯ(말의 제주어)들이 지나는 질(길의 제주어)이라는 뜻이다. 고려 말기 원나라의 제주 통치 당시 감산리 마을 동쪽에 군마 육성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기른 말들이 ᄆᆞᆯ질을 통하여 대평포구로 내려와 원나라로 실려 갔던 것이다. 사유지로 인하여 예전 올레길은 출입 금지가 되어 새로 난 올레길을 걷다가 시멘트 포장도로를 보고 적이 놀랐다. 이런 곳에 포장된 도로가 있다니! 마침 귤을 따는 아주머니가 있어 물어보니 안덕계곡에서 시작되는 도로라고 한다. 그렇다면 안덕계곡 근처 내가 걸어 보았던 감산리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서 기른 군마들이 아마도 이 길을 통하여 ᄆᆞᆯ질로 통하였던 것 같다. 주변 지역을 공ᄆᆞᆯ캐(캐는 해안가를 뜻하는 제주어)라고도 한다. 애쓰게 키운 말들이 공마(貢馬)가 되어 원나라로 떠나는 눈물의 장소이기도 한 곳이다.

월라봉에서 바라보는 화순리 남제주 화력 발전소와 송학산, 형제섬과 그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가파도의 노을이 지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월라봉에서 바라보는 화순리 남제주 화력 발전소와 송학산, 형제섬과 그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가파도의 노을이 지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30여 분 걸어 박수기정 ᄆᆞᆯ질을 올라가면 예전 올레길이 아닌 새로운 올레의 갈림길이 나오고 거기서 시멘트 포장로까지는 10여 분 걸리고, 다시 20여 분 더 걸어가면 예전 올레길과 겹치는 곳이 나온다. 예전 박수기정 전망대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40여 분 걸리는 아름다운 길을 그냥 못 보고 지나친 것 같아 너무 아쉽다. 박수기정을 돌아가며 해발 100m 이상이 되는 곳에서 바라보는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 저 멀리 송학산과 가파도, 마라도, 형제섬을 보는 것이란 상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다. 곳곳마다 사진 찍고 싶은 데가 많이 있는 곳을 지나쳐 버리는 것이란! ‘이두어시’라는 곳도 있었다. 월라봉의 이단 병풍바위 중앙에 위치하는 곳으로 감산리에 속하며 1950년대까지만 해도 20여 호의 촌락이 있었고 예래동, 대평리와 화순리, 모슬포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도보 교통로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30여 분 걸어가면 목재데크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내려가면 그곳부터 월라봉(표고 200.7m)을 오르는 가파른 길이다. 가파르지만 오를 만하며 천연계단 역할을 해주는 크고 작은 돌들과 벼랑처럼 서 있는 바위들, 나무들이 어우러져 무척 매력적인 길이다. 다시 한번 와서 이 길을 다시 걷고 싶을 만큼. 월라봉은 군사 요충지로 화순항으로 상륙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들이 구축한 7개의 동굴 진지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30여 분 걸어 내려가면 겨울과 봄에 올랭이(오리를 뜻하는 제주어)들이 찾아온다는 안덕계곡에 있는 ‘올랭이소’가 나온다. 얼마 안 가서 진모루 동산이 나오는데 지는 저녁놀이 너무 아름다워 차 한잔을 하며 쉬어가기로 했다.

진(길다는 제주어)과 모루(동산을 뜻하는 제주어)가 합해서 된 ‘진모루’ 동산. 길게 이어진 동산이다. 제주시 삼양동에서 신촌리에 이르는 곳에 ‘진드르(긴 들판이라는 제주어)’가 있다. 모슬포에 있었던 일제시대 때 비행장을 ‘알뜨르(아래에 있는 들판이라는 제주어)’, 제주 국제 공항이 자리 잡은 곳을 ‘정뜨르’라고 하는 데 ‘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모두가 일제 강점기의 아픈 상처들을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다. 진드르와 정뜨르는 일본 육군이 동부와 서부에 세운 비행장들이었고, 알뜨르는 중국대륙과 동남아 지역을 침략하기 위한 일본 해군의 전용 비행장이었다고 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 아닌,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드는 세상은 요원한 것일까.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화려한 이름을 가진 해군기지가 있는 강정동을 지나면서 여러 염원이 담긴 나무 팻말 가운데 지금도 잊히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와 가슴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나중에 보니 예언서 이사야에 나오는 성경 구절이었다. 읽는  것만으로도 답답하게 뭉쳤던 가슴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을 이끌고 다닌다.

 

진모루 동산을 10여 분 걸어 내려오면 중간스탬프를 찍는 ‘개끄리민교’ 다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제주올레 9코스 종점까지는 25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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