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기행 7코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월평 아왜낭목 쉼터까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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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기행 7코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월평 아왜낭목 쉼터까지(1)
  • 김영희
  • 승인 2020.12.04 0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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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 다가온 초겨울과 천지교
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
대학생 시절 시간과 공간 여행
김광협 시인의 시 '유자꽃 피는 마을'
천지연 전망대와 이왈종 그림같은 게이트볼장
김상헌 선생의 한시 '노인성'과 노인성제
아름다운 선녀탕과 무지개같은 황우지 해변
천지연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지연의 모습은 서귀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천지연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지연의 모습은 서귀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11월은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길목이다. 11월 중순까지 단풍잎으로 수놓았던 길이 11월 말엔 벌거벗은 나목(裸木)이 되었다. 모든 것들을 수렴하여 준비시키는 계절이 다가왔다. 자연이 속삭이는 것에 잘 귀 기울여야 한다.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기에.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10여 분도 안 되어 천지교에 이른다. 움직이는 파도와 주상절리를 형상화한 것 같은 다리 모습이 아름답다. 밑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용천수인 솜반내에서 천지연으로 향하는 물들이 흘러간다. 보이지 않지만 코앞이 바로 천지연 폭포다. 예전에는 그 다리를 건너면서도 몰랐는데 오늘에야 알고선 기쁜 충격을 받았다. 이제야 알게 되다니!

‘거거거중지(去去去中知) 행행행리각(行行行裏覺)’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가고 가다 보면 가는 중에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다 보면 행하는 속에 깨닫게 된다는 말. 중단없이 가고 행함이 소중하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되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공부이며 단련(鍛鍊)이다. 단련의 단(鍛)은 1000일의 수련을, 련(鍊)은 10000일의 수련을 말한다고 한다. 베컴의 프리킥과 박세리의 샷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단련을 통해 가능했다. 천 일, 만 일 하다 보면 절로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거기에 공부하고 단련하는 맛이 있다. 그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매양 반복되는 하루지만 같은 듯 다르다. 인생의 참뜻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오늘도 지구는 말없이 공전과 자전을 하고 시냇물은 흐른다.

대학 시절 방학이라 육지에서 내려오면 답답할 때마다 제주시 내에서 버스를 타 종점에서 내려 마냥 걸었다. 동쪽으로는 조천행 버스를 타며 가다 만세동산에서 내리고, 서쪽으로는 하귀행 버스를 타며 가다 수산봉 아래에서 내려 저수지를 거닐었다. 남쪽으로는 서귀행 버스를 타서 구 서귀포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천지연까지 걸었다. 천지연 입구에서 물 위를 수영하는 오리 떼들과 물속을 유영하는 붕어들을 보며 안으로 들어가 시원히 내리는 폭포수를 보노라면 답답했던 가슴이 확 트여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천지연 폭포 들어가는 입구에는 ‘유자꽃 피는 마을’이라는 시가 새겨진 김광협 시비가 있었다. 시를 읽고 혼자서 조용히 읊조리다 보면 내가 시 속으로 들어가 소년이 된다. 소년처럼 서러워지기도 하며 아련한 소년 시절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 여행과 공간 여행을 하다 돌아왔다.

 

   내 소년의 마을엔

   유자꽃이 하이얗게 피더이다.

   유자꽃 꽃잎 새이로

   파아란 바다가 촐랑이고

   바다 위론 똑딱선이 미끄러지더이다.

   툇마루 위에 유자꽃 꽃잎인 듯

   백발을 인 조모님은 조을고

   내 소년도 오롯 잠이 들면

   보오보오 연락선의 노래조차도

   갈매기들의 나래에 묻어

   이 마을에 오더이다.

   보오보오 연락선이 한소절 울 때마다

   떨어지는 유자꽃

   유자꽃 꽃잎이 울고만 싶더이다.

   꽃잎이 섧기만 하더이다.

 

삼매봉 정상 남성정 정자에서 바라본 문섬과 바다의 모습.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다.
삼매봉 정상 남성정 정자에서 바라본 문섬과 바다의 모습.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다.

천지교를 지나면 금방 서귀포칠십리시공원이 나온다. 시비들이 늘어서 있다. 시를 읽으며 지나다 보니 천지연 전망대까지 30여 분 지났다. 저 멀리 원경의 한라산과 중경의 수풀 속 서귀포시와 근경의 천지연 폭포는 한 폭의 살아있는 그림이다. 조금 지나면 보이는 잔디가 깔린 게이트볼장에서 남녀노소의 모습은 이왈종의 그림같다. 진시황의 사자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올 만도 하다. 제주의 전통배 모양을 본뜬 덕판배미술관을 지나 빨간 열매가 열린 먼나무 가로수길 남성마을을 지난다. 여다(女多) 섬인 제주에 여성이 아닌 남성들이 많아 남성마을일까. 삼매봉 입구에 이르는데 10여 분 정도 걸린다. 삼매봉 입구 정자에서 바라보는 범섬과 바다, 거리에 가로수로 서 있는 워싱턴야자의 모습은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 백록담을 베개 삼고 고근산 굼부리에 궁둥이를 얹어 범섬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 물장구를 칠 때 뻗은 두 발이 뚫어놓았다는 큰 구멍 두 개도 보인다. 여기서 삼매봉 정상까지는 20여 분 정도 걸린다. 삼매봉 정상에 있는 정자 남성정(南星亭)에는 여러 시인 묵객들의 현판들이 걸려있다.

   ......

   ......

   나라에서는 국운의 형통함을 점치고(王道占亨運)

   백성들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네(人家賀壽徵)

   중국 형산과 한라에서만 볼 수 있어(衡山與漢岫)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하네(此外見無會)

 

청음 김상헌 선생의 한시 ‘노인성’이다. 서양에서는 카노푸스(Canopus), 동양에서는 노인성이라 부르는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별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줄여서 남성(南星). 그래서 정자 이름도 남성정, 올라올 때 마을 이름도 남성마을이었구나. 추분부터 이듬해 춘분까지 서귀포시 정남쪽 수평선 4° 높이에서 볼 수 있는 별이며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가 노인성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시기라고 한다.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 선생도 서귀포에서만 보이는 이 별을 보기 위해 한라산을 세 번이나 올랐다. 이 별이 밝게 보이면 국운이 융성하고 전쟁이 사라진다고 하여 조선 시대에는 국가 제사로 노인성제를 매년 춘분과 추분에 두 번 지냈으며 1960년대 중후반까지 국운 융성을 비는 제사가 서귀포 남성대에서 올려졌다고 한다.

삼매봉을 내려오다 보면 소암 선생이 한자로 ‘남성대(南星臺)’라고 쓴 비석도 보인다. 천진난만한 듯 익살스러운 글씨가 오래 발길을 머물게 한다. 외돌개를 향하여 내려간다. 자동차들이 오가 가는 도로변까지는 20여 분, 거기에서 다시 선녀탕 입구까지는 10여 분 걸린다. 무지개를 타고 온 선녀들이 목욕했다는 선녀탕을 보러 돌계단을 내려갔다. 신선 바위가 있는 선녀탕은 정말로 선녀들이 내려올 만하다. 멀리 동너븐덕도 보인다. 무지개를 뜻하는 제주고어 ‘황고지’, 황고지가 변하여 황우지로 되었다는 황우지 해변은 올레길에서 벗어나 있지만 가볼 만한 곳이다. 굽어진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겼다. 멀리 보이는 새연교와 새섬, 그 위로 머리만 내민 섶섬, 그리고 문섬의 아름다운 경치가 시원하게 눈을 씻어준다. 솔바람 소리, 파도 소리는 어떤 교향악보다 더 말끔히 그동안 지쳤던 여로의 마음을 씻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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