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기행 18코스: 제주시 간세라운지에서 조천 만세동산까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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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기행 18코스: 제주시 간세라운지에서 조천 만세동산까지(1)
  • 김영희
  • 승인 2022.01.28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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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읍성을 복원한 제주 성터
제주 최초의 사액 서원 '귤림서원'
오현 선생을 기리는 조촐한 오현단
조선 시대 동방 오현, 로마 시대 오현제와 제주 오현
귤림 농장에 대한 추억
복원된 제주 성터의 모습
복원된 제주 성터의 모습

드디어 제주시 중심지에 입성했다. 간세 라운지는 제주시를 동서로 가르는 중앙로 근처에 있다. 정확히 얘기하면 중앙로 서쪽이다. 중앙로 동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서귀포시 매일올레시장과 같은 제주시 동문시장도 있다. 간세 라운지에서 출발하여 중앙로 길을 따라 걷다가 길을 건너서 좀 더 올라가면 옛날 제주읍성을 일부 복원한 제주성터와 함께 오현단이 나온다.

제주읍성은 고려, 조선 시대 제주도의 중심이자 제주목을 방어하던 성곽이었다. 고려 숙종 10년(1105년) 제주도에 탐라군(耽羅郡)이 설치되면서 탐라국은 고려의 지방 행정구역의 하나가 되었다. 그때 새롭게 개축한 것이 제주읍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가 4,394척(약 1,424m), 높이 11척(약 3.3m)이었다고 한다. 탐라국 때의 무근성의 서북쪽 성벽과 서쪽 지역은 고성(古城)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 초기 만해도 동쪽의 산치천과 서쪽의 병문천 사이에 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성 내부에 우물이나 연못이 없어서 식수 구하기가 어려워 1565년에 부임한 제주 목사 곽흘(郭屹)이 성을 산지천과 가락천 밖으로까지 넓혀 축성하였다. 하지만 제주읍성은 일제 강점기 한일합병 직후 전국에 읍성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훼철되며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제주읍성의 동문, 서문, 남문이 헐리고 제주항 개발을 하면서 간척과 매립에 제주읍성의 돌들이 쓰이면서 성벽이 헐렸다.

복원된 귤림 서원의 모습
복원된 귤림 서원의 모습

오현단 뒷벽이 바로 복원된 제주성터다. 귤림서원(橘林書院)과 장수당(藏修堂)도 복원되었다. 귤림서원은 1682년 숙종이 현판을 친필로 쓰고 서적과 토지를 하사한 제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묘(오현 추모)와 강학(장수당)의 공간을 갖춘 조선 시대 제주 유학의 산실이었다. 제주 출신으로 처음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세종 때 한성판윤-현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이라는 높은 벼슬을 하여 명당이라고 일컬어진 고득종(高得宗)의 집터에 세워졌다.

16세기 중엽 퇴계 이황의 요청으로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시작으로 전국에 서원이 우후죽순으로 건립된 지방 사학 시대에도 1백 년이 넘도록 제주도에는 서원 하나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인문계 고등학교 하나 없었다. 1946년 오현중학교가 개교하면서 비로소 생겼고 1972년 화북 별도봉 기슭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 오현단 옆에 있었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헐리게 되자 1892년 귤림서원 옛터에 조촐한 제단을 만들어 오현(五賢)을 기렸다. 그것이 오늘날 오현단(五賢壇)이다.

 

   충암 김정(冲庵 金淨): 중종 15년(1520년) 제주 유배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 중종 29년(1534년) 제주 목사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선조 34년(1601년) 안무어사

   동계 정온(洞溪 鄭蘊): 광해군 6년(1614년) 제주 유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숙종 15년(1689년) 제주 유배

 

조촐한 오현단의 모습. 조촐하니 더 의미있고 아름답다.
조촐한 오현단의 모습. 조촐하니 더 의미있고 아름답다.

제주 유배 3분, 제주 목사 1분, 업무차 안무어사(按撫御史)로 다녀간 1분, 그래서 오현(五賢)이다. 정몽주, 길 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전승된 도학(道學)의 맥을 이었으며 조선 시대에 문묘 배향했던 동방 오현(東方 五賢)-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제 이언적, 퇴계 이황-이 있고, 로마의 황금기 시대를 이끈 다섯 현명한 황제인 오현제(五賢帝)-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있고 제주 오현(濟州 五賢)이 있는 것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현이라는 명칭이 좋고 유명한가 보다.

오현단 근처에서 태어난 인연이라서 그런지 오현 학원에서 30여 년간 봉직했다. 딸도 태어나자 두 가지 이름 가운데 오현의 ‘어질 현(賢)’자가 있는 이름을 선택했다. 대학 시절 아버지가 먼동이 트기 전 어머니와 함께 나아가 손수 일구신 5천여 평 되는 감귤과수원 철문에 귤림 농장이라고 페인트로 쓰라고 했다. 박정희 시대 초등학교 시절 누구나 암송했던 국민교육헌장 쓰기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실력으로 정성을 다하여 썼다. 눈웃음 지으며 흡족해하신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서당에 조금 다니셨다는 아버지가 배움의 한이 서렸는지 귤림서원에서 따 온 것임을 분명히 알겠다. 우연의 일치 같은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필연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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