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봉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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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봉선화
  • 한복섭
  • 승인 2020.06.1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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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수필가 한 복 섭

빨간 봉선화

몇 시쯤이나 됐을까.

잠결에 비가 오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어렴풋이 머리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니 두어 시. 아직 새벽이 오기엔 깊은 한밤중이다.

일터로 간, 아들이 돌아오지를 않아서 기다리다 못해 깜빡 깊은 잠 들었나 보다. 매일 저녁 여덟시만 되면 돌아오던 아들이 오늘따라 이 깊은 한밤중에도 돌아오지를 않는다.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다가 주님께 맡기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제 서야 잠을 청했다.

간밤 그렇게 잠을 잔 탓일까. 오늘 아침은 예전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무의식중에 아들 생각이 떠올라서 건너편 아들 방을 바라보니 무사히 귀가하여 깊은 잠이 한창이다. 몹시 피곤한 모양이다.

산천이 신록으로 짙어가는 유월의 아침이다. 창밖을 내다봤다. 비가 오고 있었다. 아주 큰 비다. 봄비라 하기에는 그렇고 초여름의 비, 날씨다. TV에서 일기 예보를 들었다. 올해는 장마가 조금 늦게 온다는 예보다. 요즘 일기 예보가 오락가락 맞지를 않으니 어느 것 하나 믿을 수가 없다.

중·남부지방엔 땅이 메말라 농민의 애타는 마음이 이만저만 아니다. 장맛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 장맛비가 중부지방에도 북상하여 단비를 내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제에 앉았다. 아파트 발코니 유리창에 내리고 있는 빗방울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난날 추억이 떠오른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겼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 들으며···.

문득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장맛비가 내리는 이런 날, 옛 추억 하나를 꺼내 한 편의 글을 써야겠다.”며 다짐을 하고서는 서제에 앉았다. 요즘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게으름은 아닌지,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며칠 전에 빨간 봉선화 꽃을 구해다가 화분에 심었다. 글을 쓰기 위함이었다. 글을 쓰는 데도 소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비 갠 오후다. 아내와 지난날의 첫 사랑의 얘기를 재미있게 나누다가 문득 밖으로 나왔다 가만히 있는 자에게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며 행동으로 옮기고 나니 마음이 기쁘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쉽게 태만해 버리는 습관이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스스로 노력하여 일궈내는 성취감보다는 안주하려는 경향이 많다.

빨간 봉선화 꽃을 얻어왔다. 동네 마을길을 돌아다니다 아는 분에게 얻은 것이다. 화분은 옆집 멋쟁이 아가씨가 몇 해 전에 준 것을 간직해 두었다가 올여름에 꺼내서 빨간 봉선화를 심게 되니 마음 뿌듯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마을 이름은 도련道連이란 마을이다. 이웃 마을과 마을사이 길이 잘 이어져 소통이 잘된다는 의미에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중심도시, 로마에 가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길가에 핀 여러 종류의 꽃들도 아름답다. 봄이면 어김없이 화사하게 피는 벚꽃, 철쭉, 진달래, 가을이면 한 집 건너 울타리에 밀감 향기로 온 동네가 가득하다.

빨간 봉선화! 어릴 적, 시골 고향 집에서의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이 깃든 꽃이다. 시골집이긴 하나 아버님은 조선 시대 조천면장을 지내셨던 분이시라 체통이 있는 면장 집 닮게 마당은 네모가 반듯하고 마당 한편에 꽃밭이 있었다. 작은 누나와 작은 형이 만들어논 아름다운 정원이다. 어느 쪽에서도 보아도 잘 보이는 곳이었다. 그 시절 시골에는 정원이 있는 집들이 많지 않았다.

요즘 세상은 난, 화분 몇 개쯤은 가정의 필수적이다. 방안, 서제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내가 살고있는 아파트 베란다 앞에도 여러 종류의 꽃이 있다. 매일 아침이면 아내는 물을 주고 미소를 머금으며 서로 바라보곤 한다.

고향 집, 꽃밭에는 다알리아, 가을에 피는 하얀 국화, 반초, 많은 꽃들이 심어져 있다. 그중에 봉선화 꽃만이 화단 밖, 마당 옆에 즐비하게 심어져 있는 것이다. 여름 날, 오늘같이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초가지붕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큰 빗방울을 온몸으로 뚝뚝 맞는 것이다. 나도 온몸이 적실정도로 맞은 적이 있다.

천진난만하던 어린 시절, “울밑에선 봉선화야, 봉선화야,”하며 난 동요를 불렀다. 그 꽃밭의 그리움, 봉선화 꽃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며 향수를 달래고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늦은 여름날 오후, 지는 해 비낀 볕에 붉게 물든 담쟁이가 돌담장위를 기어오르고 초가집 처마 밑으로 벌 나비가 날아드는 고향집 풍경이 살포시 그립다.

어느 날 비 갠 오후가 되면 누나의 벗들이 집에 놀러 온다. 봉선화 꽃을 보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참 재미있다. 밑동이 빨간색이면 빨간 꽃을 피우고, 하얀색이면 하얀 꽃을 피운다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말을 하다가 꽃잎을 따서 손톱에 꽃물을 들이고 하던 모습들. 어쩜 그 시절이 그렇게 즐거웠는지 해 저무는 줄 몰랐다.

유월의 깊어가는 한여름 밤, 빨간 봉선화가 내게 주는 의미는 옛날의 정겨웠던 추억들이 나를 새롭게 하고 있다. 이제 칠팔월이면 봉선화 꽃이 피고. 내 곁에 있으니 다행스럽고 마음 설렌다.

요사이 살고 있는 마을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집 할 것 없이 돌담 장 밑에 열을 지어 빨강, 노랑, 하얀 봉선화 꽃이 한창이다. 여름날의 고향 집에서의 풍경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은 누나 형 곁에서 동심의 복판을 머무르고 있을 즈음에-.

방금 아내가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여보! 비가 오네요. 짙은 냉커피에 저희 향기 내음 드시면서 글을 쓰세요.” 라는 말이 귓전에 감미롭다.

“봉선화야, 봉선화야, 빨간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길고긴 여름날에 너도 나처럼 짙은 블랙커피 향기 맡아보지 않을래.” (2020.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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